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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는 한국병합 반대파이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저지한 메이지 6년 정변

2020-08-05  카테고리:한일 병합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병합 반대파이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저지한 메이지 6년 정변

Photo by 毎日新報 (licensed under CC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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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탄생 (1841년)

메이지 6년 정변(1873년) 이토오히로부미(32세)

정원구성원(국가의사결정기관)

정한론파 사이고오타카모리 에토오신히라이타가키테이스케 고토오쇼오지로 후지마타네오미

비정론파 산죠오미 이와쿠라구시 키도타카노스케 오오쿠보토시미치 오쿠마시게노부 오키타쿠토

당연하지만, 이토(伊藤)는 아직 젊고 정원의 멤버가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70년부터 발족한 「공부성」의 설치에 진력.공부성은 1871년 철도 조선 광산 제철 전신 등대 제작 공학 권공 토목 등 10개 기숙사와 측량 1개 업체로 편성됐다.

산조 미타마사 대신이 병에 걸렸을 때 정한론에 반대했던 이토의 이와쿠라를 의장으로 하는 아이디어로 정한론은 실패로 끝나고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600명의 사쓰마 번사는 정치세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강화도 사건(1875년) 이토오히로부미(34세)

측량이나 항로 연구를 명목으로 한반도에 군함을 파견해 군사적 위압을 가하는 방안에 대해 태정대신 산조 미나미는 이를 비판했다.그러나 해군 다이스케 가와무라 준요시의 건의에 따라 『운양』, 『제2정묘』 등 2척의 군함이 조선 연안에 극비리에 파견된다.강화도 사건의 발단이 된 운양의 함장은 사쓰마 번 출신 이노우에 요시카루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강화도 사건을 지시했다는 오해가 있는 듯하지만 일련의 흐름을 봐도 어디에도 이토의 글씨가 없다.철도를 만들면서 전함을 지시하겠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토(伊藤)가 이와쿠라(岩倉)와 오쿠보(大久保)의 신용을 얻게 된 것은 메이지 6 년의 정변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