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문은 청일전쟁 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여 서재필이 건설한 것 그것조차 모르는 한국대통령
2021-04-06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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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을 세운 친일파 서재필
동학당의 난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조약에서 한반도의 독립이 명기되자 이를 기뻐한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청나라 복속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부수고 터 옆에 독립문을 세웠다.이것이 한국 서울의 독립문이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소꿉친구로 일본 게이오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을 지향하지만 김옥균은 민비에 의해 보내진 자객에게 상하이에서 암살 당하고 모국으로 돌아와 시신을 토막토막 절단당해 각지에 버려지는 비참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한반도 내에 남은 서재필의 가족들도 민비 등에 의한 숙청 를 받아 차례차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됐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MEMO 시모노세키 조약의 서명인은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입니다.독립문은 김옥균의 동지 서재필이 지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독립문이 일제 강점기로부터 독립한 기념으로 지어진 문이라고 믿는다.그 문 앞에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는 인간이 문재인이다.대통령 출마 선언도 독립문에서 이뤄졌고 광복절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듯 이 문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대통령의 역사인식이 이 정도면 한일관계가 개선될 리 없다.
POINT 한국에서는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해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의 날로 되어 있습니다.그날 독립문에서 기념촬영이라니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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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한자를 배우는 일본 한자를 폐지한 한국 문자를 폐지함으로써 과거사가 블랙박스에
한자를 읽지 못하고 역사를 읽을 수 없다
한국의 독자적인 문자 한글
과거사 원문을 읽는 일본인
역사정보를 특권계급이 독점?
한국은 1970년 한자를 폐지했다.오선화씨는 당시를 돌아보며 1970년 봄이면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민족의 문자를 쓴다는 이유 같지만 결과를 보면 한국인들은 과거 문서를 읽을 수 없게 됐다.과거 한자가 사용되어 기록된 일체의 역사를 읽을 수 없다.
한글은 일본에서는 표음문자라고 불리는데, 정확히는 음절문자가 된다.한자의 한 글자 음독을 한글 한 글자로 대체한 것이다.그래서 동음이의어는 같은 한글 문자로 표현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 알 수 없다.이것은 일본의 히라가나 표기와 같을 것이다.
과거사를 인터넷으로 조사해도 좀 더 원문, 전문을 일으킨 기사를 찾아 결과적으로 공문관 원문을 확인하기도 한다.공문관에서는 공개된 과거 공문을 원본 친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안중근의 자서전도 그의 친필 그대로 공개돼 있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회상 부분도 읽을 수 있다.그런 과정 속에서 인터넷 리터러시가 유지되는데 한국에서는 어떨까.
한글로 자의적으로 쓰인 정보에만 노출돼 원문을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일반에 문자가 보급되지 않은 것은 특권계급이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이다.노비에게 문자나 정보는 필요 없다.한자 폐지로 무엇이 초래되었는가 하면 과거사가 특권계급의 전유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공문서는 모두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원본 그대로 공문서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는 인터넷으로도 열람이 가능하다.한자를 읽을 수 있다는 특정 한국인만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대로 한자를 읽을 수 있다면 한국 정부는 곤란할 것이다.
한일병합기에 한반도는 근대화되어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한국 정부의 모순된 데이터
이는 한국 통계청이 공개하고 있는 한일 병합기 한반도의 실태입니다.
의사 수: 약 7배 증가
감염병 사망자 수: 우위로 감소
수도 공급량: 약 4.8배 증가
유치원 수: 10년 만에 약 2배 증가
아동보호사업: 약 4.3배 증가
공립 초등학교 수: 약 7.5배 증가
인구: 약 1.8배 증가
강도 수가 우위로 감소했다.
일본통치시대에 한반도는 크게 경제성장을 하여 근대화의 길을 달려가던 시대였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병합되어 노예화되고 학살당했다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지만 인구는 증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일 병합기는 약 35년입니다.이 기간에 1.8배로 인구가 증가한 원인으로는 치안 유지나 의료 정비나 빈곤 감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치안은 법률, 경찰, 교육의 보급에 의해서 유지되고, 의료는 의료 종사자의 인적 보충과 약이나 의료 기기등의 물자면의 충실에 의해 실현됩니다.
빈곤 감소는 많은 직업 창출로 인한 고용 증가와 식량 사정 개선이 필요합니다.일본은 이러한 모든 면에서의 사회 정비를 실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구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이 데이터는 한국 정부 자신이 공개하고 있는 데이터임에도 전혀 모순된 주장을 국가 전체적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신해혁명을 지탱한 일본 중국 건국은 일본 유학 중이던 쑨원이 달성한 것 쑨원은 청일전쟁이 끝난 뒤 광저우에서 무장봉기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1897년 미야자키 도도텐의 소개로 두야마 미쓰루와 만났고, 두산을 통해 히라오카 코타로로부터 도쿄에서의 활동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았다.또 주거지인 와세다의 2천㎡ 저택은 이누요타케시가 주선했다.1902년에 일본인 오쓰키 카오루(大月薫)와 결혼했다.
오랫동안 만주민족의 식민지로 여겨졌던 한민족의 손문은 독립하고 싶다, 辮발도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같은 해 미야자키 도도텐 등의 원조로 중국 동맹회를 결성. 여기서 도쿄에 유학중인 장제스와 만난다.
1911년 10월 10일 공진회와 동 학회의 지도하에 무장봉기가 일어나 각 성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을 호소하는 신해혁명으로 발전하였다.
현재도 베이징 상하이 우한 난징 다롄 홍콩 등에 쑨원의 일본 이름인 중산을 딴 중산공원이 있다.길 이름에도 중산로라는 것도 많아 손문이 일본인 아내를 둔 것은 중국인은 누구나 알고 있다.사실 나는 중국에 갔을 때 처음 중국인에게 들었어.
미야자키 유텐은 김옥균과도 교류가 있어 일본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를 심화시켰다.김옥균의 암살로 한반도는 자력 근대화의 길을 끊게 되었다.
조선을 독립국으로 취급한 북일 수호조규 천황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이 시대부터 변함이 없다
1876년 체결된 북일수호조규는 불평등조약이라는 측면이 있으나 조선을 독립국으로 한 최초의 조약으로 조선왕조 개국의 계기가 되었다.강화도 조약라고도 불린다.북-일 간에는 에도시대에는 조선통신사에 의한 국교가 있었지만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메이지천황의 국서를 조선은 받지 않았다.
이유는 도쿠가와와는 대등한 관계였는데도 도쿠가와를 신하로 하는 천황의 존재는 조선왕조를 격하에 위치시키는 라는 이유나 종주국 청나라 황제에 대해 천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여기서 북-일은 단교 상태가 된다.
지금도 한국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부릅니다.천황의 칭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 시대에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875년 일어난 북-일 간 무력충돌인 강화도 사건을 거치면서 일본은 사죄 요구 등을 포함해 청나라에 대해서는 종주국이라면 책임지라고 요구한다.이에 대해 청은 조선은 속국이지만 다른 민족, 다른 정치형태를 갖고 있으며 청은 책임이 없다 라고 밝히고 있다.이를 바탕으로 북-일 수호조규 제1관에는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과 평등의 권리를 가진 국가로 인정한다.'고 기재되게 된다.
청나라의 속국이기는 하지만 독립국가로서 다소 모순되는 점을 포함하면서 양자 국교가 시작된다.이후 1894년 발발하는 청일전쟁을 거쳐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자주의 나라임을 확인하고 독립자주를 손해보는 조선국으로부터 청국에 대한 공·헌상·전례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고 기재되어 명실상부한 조선은 독립국이 되었다.이 조약을 체결한 일본 측 책임자가 이토 히로부미이다.
조선은 수백 년래 독립국이 아니었습니다.독립국으로 만든 것은 바로 일본입니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과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후미요시는 하쿠분지에서 화해.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한국의 박문사에 1939년 10월 15일 한 인물이 공양하러 왔다.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이다.상하이에서 온 한반도인 만선시찰단에 참가해 방문한 것이었다.
공양은 11시부터 시작됐으며 이토 히로부미 초상화 옆에는 안중근의 위패도 놓여 있었다.안준생은 아버지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를 공양했고, 독경한 고마다는 안중근의 위패를 그에게 건네며 두 영혼을 영원히 추모하라고 타일렀다.
이후 안준생은 취재차 찾은 기자에게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30년간 제사를 게을리 했다.지금 이토(伊藤) 공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아버지의 위패를 받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16일 안준생은 경성조선호텔로 향한다.그것은 어떤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 상대는 이토 후미요시.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인 .이토 후미요시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다는 안준생의 제의에 대해 이토 후미요시는 우리 아버지는 이미 신이 되어 부처가 되어 하늘로 돌아갔다.지금 무엇을 사과할 필요가 있을까.그보다는 나라를 위해 성의를 다하자."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17일 이토 후미요시와 안준생은 박문사를 찾아 서로의 아버지에 대한 교환 공양을 올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고 안중근의 아들과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후미요시는 1939년에 이미 화해를 했습니다.후미요시는 함께 나라를 위해 성의를 다하자고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