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병합의 진실 - 조선왕조는 자립할 수 없었다 - 청일전쟁부터 한일 병합까지 15년간.
2022-07-07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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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의 역사를 배우면 분명
일본이 한반도의 독립을 폭력적으로 빼앗은 것은 아니라는 점은,시모노세키 조약에서 한일 병합까지 단 15년의 역사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지원하고 결국 그것을 포기했다.이것이 역사의 진실입니다.
독립 후 1년도 채 되지 않아 국왕이 도망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4월):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에 의해 한반도는 독립국가가 된다.
춘생문 사건(1895년 11월): 친러파 이범진이 총리대신 김홍집 암살을 기도한 사건.
노관파천(1896년 2월):춘생문 사건을 거치면서 조선 내 싸움에 신변의 위험을 느껴 국가원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사건.독립한지 1년도 안된 시점에 주권을 포기 해버린다.
고종 환궁을 위해 뿌리 돌리기
고무라-베버 협정(1896년 5월) : 일본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조선국의 내정을 감독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의 환궁 실현의 조건으로 러일의 군대 주둔 정원 등을 정했다.
산현-로바노프 협정(1896년 6월) : 러일간에 조선의 독립을 보장할 것, 조선의 재정개혁을 촉진할 것, 근대적 경찰 및 군대를 조직할 것, 전신선을 유지할 것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대한제국의 건국과 러일전쟁
대한제국 건국(1897년): 러일 협정을 전제로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고치고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다.일본 및 중국과 동격이라는 의미이지만 일본은 이를 승인.
러일전쟁 발발(1904년): 한반도내 러시아 이권의 확대는 계속되어 러일전쟁이 발발.
한국의 주권을 제한
제1차 일한협약(1904년) :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추천인을 한국 정부의 재정·외교 고문으로 임명하게 된다.
제2차 일한협약(1905년) :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을 두는 등 보호국화를 확정한 협약.
헤이그 밀사사건 : (1907년) :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회의에 고종이 밀사를 파견하여 어느 나라 대표도 접견하지 못한 사건.한반도의 일본관할권을 인정받은 회의가 되었다.
아울러 읽고 싶다
헤이그 밀사 사건은 고자 외교 - 밀사는 왜 무시당했지?주권을 포기한 조선을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
러일전쟁 전 대한제국 건국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돕고 결국 외교권을 박탈
헤이그 밀사 사건은 한심한 외교 실패
주요 밀사의 활동
헤이그 밀사사건 이전에 이미 주권포기
러시아 이권의 남하가 러일전쟁의 원인
국가원수가 도망쳐 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하는 실수를 벌인 고종은 제1차 러일의정서(고촌 베버협정), 제2차 러일의정서(산현 로바노프협정)가 체결되고 그 전제 아래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쳤다.제국의 이름을 국호에 붙이는 것은 일본 중국과 동격이라는 뜻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승인했다.
이후 1904년 시작된 러일전쟁 중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에 따라 한반도는 외교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러일의정서에 의해 러시아와의 이야기를 붙여 일본은 일본과 동격인 대한제국의 건국을 도왔음에도 고종이 러시아 이권을 끌어들이게 된다.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교권 회복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이 1907년 헤이그 국제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이다.현재 행해지고 있는 고자 외교와 같은 일을 당시에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했을 러시아가 배신하고 참가국 모두에게 거절당했고 고종이 보낸 밀사는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관할권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이 되었다.
[주요 밀사 활동]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러시아 제국 주석 대표 네리도프 백작을 방문하지만 면회를 거절당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각국 대표를 방문하지만 지원을 거부당한다.
회의 개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부 장관에게 면회를 요구하지만 거절당한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회의는 일본의 한반도 관할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애초 민비암살이나 춘생문 사건을 거쳐 국가원수인 고송이 1896년 하필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 망명했다(노관파천).이 시점에서 세계로부터 조선은 자주독립국가로 이미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일본덕분에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
망명지에서 원격통치 같은 것을 하려 해도 이미 러시아의 연금 상태여서 차례차례 러시아는 한반도의 이권을 챙기게 됐다.고종이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을 건국한 후에도 러시아는 한반도 이권을 계속 챙겼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러일전쟁이다.
이씨조선은 청나라에 울음을 터뜨려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고, 로관파천으로 러시아 이권에 침식되어 러일전쟁에 이르게 됩니다.외교권을 박탈당한 것에 불복하여 밀사를 보낸 것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그 후 일본은 한반도의 독립을 포기하게 됩니다.
한일합방으로
한일병합이 각의결정(1909년 7월):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방침 및 대한시설대강"이 가쓰라 내각에서 각의결정.
이토 히로부미 암살(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암살.
한일병합(1910년 8월): "한국병합 라세키술조약"에 의해 한일병합.
자립심 결여된 이씨 조선~대한제국
이상의 흐름을 단적으로 파악하면,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르고 한반도를 독립국가로 만들었습니다.그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친 국가원수를 다시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뿌리 돌리기까지 하여 일본이나 중국과 동등한 제국의 이름을 딴 대한제국의 건국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도 러시아의 남진을 전혀 막지 못하고 조선 내 친러파와 친일파의 대립은 계속됩니다.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은 더 이상 한반도는 자립통치를 할 수 없다고 판단 하며 권한을 제한하기 시작했습니다.그리고 순종은 일진회 등 친일파의 후원을 받아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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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환상의 영웅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병합을 했다는 거짓 교육.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병합을 한 인물?
중대한 착오를 범했다고 발언한 안중근
이미 화해한 유족과 용서하지 않는 세력
알려지고 싶지 않은 진실 조작시킨 거짓말
진실은 어둠에 묻힌 채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정한론자였다고 완강히 믿고 있습니다.그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저는 이토가 한국통감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토가 한일 병합론자였다고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시종 한일 병합에는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얼굴도 모른 채 암살을 저지릅니다.이토(伊藤)는 더 이상 총리대신도 총감도 아닙니다.그리고 안중근은 옥중에서 자신이 중대한 착오를 저질렀다고 발언합니다.
1939년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박문사에서 이토의 공양을 올리고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아들 이토 후미요시를 면회하여 사과를 하고 화해하였다.이를 용서하지 못한 김구는 장제스에게 상하이에 살던 안준생에게 조작 혐의를 씌워 처형해 달라고 부탁한다.이것은 즉, 어떻게 된 것일까.
안중근은 영웅이어야 한다.반일 독립파 영웅으로 이용돼야 한다.이것이 독립을 지향하는 세력의 희망이었다.즉 이토 히로부미는 정한론자여야 한다는 얘기다.한국인들이 오해해서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병합을 추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렇게 조작된 것이다.
이토가 병합에는 반대였다는 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조차 몰랐다는 점, 암살은 중대한 착오였다고 안중근이 말한 점, 유족들이 이미 화해한 사실 등은 국내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
안중근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영원히 정한론자인 것이다.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뉘른베르크법은 우생사상과 결부된 인종박해-욱일기와 하켄크로이츠를 동일시하는 한국.
한국에서는 서경덕이라는 교수가 욱일기에 대해 나치의 하켄크로이츠와 같다고 주장하면서 사사건건 욱일기와 비슷한 문양을 사용했다는 것만으로 그 제작자에게 메일을 보내 역사인식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의 반일운동을 벌이고 있다.일본에서도 가끔 뉴스에서 거론되지만, 원래 하켄크로이츠는 나치당의 당기이고, 그것을 국기로 만든 경위부터 나치당이 해체되는 바람에 그 깃발이 폐지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위부터 전혀 배경이 다르다.욱일기는 당의 깃발에서도 특정 사상단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일본 문화의 태양신앙 표현의 하나로 풀이된다.
한국측 주장으로는 일본의 침략을 받은 욱일기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치 치하에서의 유대인 통치 실태와 한일 병합기의 한반도인 취급 실태를 비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한국은 유대인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나의 예로 국가에 의한 탄압이라는 의미라면 법적인 제도가 존재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뉘른베르크법을 다룬다.
뉘른베르크법이란 1935년 나치가 제정한 반유대법이다.내용으로는 독일 거주 유대인은 제국 시민으로 간주되지 않고 '독일인 또는 그 혈족'과의 결혼이나 혼외 교섭(성관계)이 금지되었다.이들은 '인종적 품행'으로 규정돼 발각되면 형사처벌을 받는다.독일민족유전위생보호법은 모든 혼인예정자에 대해 공중위생당국으로부터 혼인적합증명서를 취득하도록 의무화했다.1936년의 올림픽 베를린 대회에서는 독일은 유대인의 출전을 허가하지 않았다.이는 나치의 아리아 지상주의에 입각한 우생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나치 당기의 열쇠십자는 아리아인의 상징으로 묘사된다.즉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이 우생 사상에 의한 인종 박해였고 결과적으로 민족 소멸 작전(제노사이드)으로 향해 갔다.
한일합방기는 전혀 다른 한반도인들에게 일본인으로서의 시민권을 부여하고 동일법을 따랐다.참정권도 주어졌고, 교우도 혼인도 자유로웠으며, 같은 공공시설이나 학교를 사용했다.한반도 출신인 손기정은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해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이 출전 대회는 유대인의 참가가 금지된 1936년 베를린 대회이다.일본은 한반도를 청나라 속국의 입장에서 해방시키고 인구의 40%에 이른 노비를 개방하여 평등한 시민으로 만들었다.나치와 일본을 비교한다면 오히려 정반대인 것이다.
서울독립문은 청일전쟁 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여 서재필이 건설한 것 그것조차 모르는 한국대통령
동학당의 난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조약에서 한반도의 독립이 명기되자 이를 기뻐한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청나라 복속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부수고 터 옆에 독립문을 세웠다.이것이 한국 서울의 독립문이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소꿉친구로 일본 게이오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을 지향하지만 김옥균은 민비에 의해 보내진 자객에게 상하이에서 암살 당하고 모국으로 돌아와 시신을 토막토막 절단당해 각지에 버려지는 비참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한반도 내에 남은 서재필의 가족들도 민비 등에 의한 숙청 를 받아 차례차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됐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서명인은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입니다.독립문은 김옥균의 동지 서재필이 지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독립문이 일제 강점기로부터 독립한 기념으로 지어진 문이라고 믿는다.그 문 앞에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는 인간이 문재인이다.대통령 출마 선언도 독립문에서 이뤄졌고 광복절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듯 이 문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대통령의 역사인식이 이 정도면 한일관계가 개선될 리 없다.
한국에서는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해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의 날로 되어 있습니다.그날 독립문에서 기념촬영이라니 놀랍네요
한일 병합기에 세워진 명동예술극장.당시의 이름이 메이지좌라는 것을 한국인들은 많이 알지 못한다
명동예술극장은 메이지마치에 있던 메이지좌 이다.메이지초는 현재의 명동이 되었고 메이지좌에서는 많은 영화와 연극이 개봉되었다.
1937년 4월 24일에는 세이미네 영화각과 신흥 키네마가 합작해 이규환(한국어판)과 스즈키 시게요시가 공동 감독한 한국어로 된 첫 토키 나그네(한국어판)(일본 개봉작 여정)가 이 관에서 개봉했다.
동관에서는 일본어판 상영이었지만, 같은 날, 부내의 우미관에서는 한국어판이 공개되고 있다.국내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의 개봉관 역할도 하며 1940년 8월 6일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등록금(감독 최인규), 1941년 2월 19일 동아영화사가 제작한 영화 지원병(감독 안석영)이 이 관에서 개봉했다.
노예가 영화를 보는 것일까.봤다면 이미 노예는 아닐 것이다.그래도 노예가 됐다면 일본은 일부러 노예를 위해 영화를 공동 제작해 보여줬을까.
그래도 이미 대우가 노예가 아니다. 노예가 휴일에 영화보러간다 . 휴일이 있는가.신기하다。
당시 한국인 영화감독이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은 상당히 과거에 영화를 보고 있는 셈이다.왜 노예가 영화를 찍을 때까지 영화를 보고 공부할 수 있었을까.아니면 일본 영화사에라도 취직했을까.
일본통치시대 한반도는 근대화되고 나라가 날로 풍요로워지는 것을 실감하는 시대였습니다.
한자를 배우는 일본 한자를 폐지한 한국 문자를 폐지함으로써 과거사가 블랙박스에
한자를 읽지 못하고 역사를 읽을 수 없다
한국의 독자적인 문자 한글
과거사 원문을 읽는 일본인
역사정보를 특권계급이 독점?
한국은 1970년 한자를 폐지했다.오선화씨는 당시를 돌아보며 1970년 봄이면 모든 교과서에서 한자가 사라졌다고 말한다.
민족의 문자를 쓴다는 이유 같지만 결과를 보면 한국인들은 과거 문서를 읽을 수 없게 됐다.과거 한자가 사용되어 기록된 일체의 역사를 읽을 수 없다.
한글은 일본에서는 표음문자라고 불리는데, 정확히는 음절문자가 된다.한자의 한 글자 음독을 한글 한 글자로 대체한 것이다.그래서 동음이의어는 같은 한글 문자로 표현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지 알 수 없다.이것은 일본의 히라가나 표기와 같을 것이다.
과거사를 인터넷으로 조사해도 좀 더 원문, 전문을 일으킨 기사를 찾아 결과적으로 공문관 원문을 확인하기도 한다.공문관에서는 공개된 과거 공문을 원본 친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안중근의 자서전도 그의 친필 그대로 공개돼 있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의 회상 부분도 읽을 수 있다.그런 과정 속에서 인터넷 리터러시가 유지되는데 한국에서는 어떨까.
한글로 자의적으로 쓰인 정보에만 노출돼 원문을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일반에 문자가 보급되지 않은 것은 특권계급이 정보를 독점했기 때문이다.노비에게 문자나 정보는 필요 없다.한자 폐지로 무엇이 초래되었는가 하면 과거사가 특권계급의 전유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공문서는 모두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원본 그대로 공문서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는 인터넷으로도 열람이 가능하다.한자를 읽을 수 있다는 특정 한국인만 접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대로 한자를 읽을 수 있다면 한국 정부는 곤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