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한계 - 병합 당시 모든 것이 부족했던 한반도.
2021-07-10
카테고리:한일 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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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나 바늘이 의미하는 것
1805년 조선의 유교학자 정동유(鄭東愈)는 한반도에 없었던 것으로 양, 바퀴, 바늘을 꼽았다.바퀴는 나무를 변형하여 가공하는 기술을 의미하고 바늘은 금속의 정밀 가공을 의미한다.당시 한반도에는 바퀴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 짐은 소의 등이나 사람이 어깨나 머리 위에 메고 운반하고 있었다.바늘에 대해서도 금속의 끝을 뾰족하게 하고 뒷부분에는 실을 꿰뚫을 구멍을 만들어야 했으며, 이들은 중국에서 들여왔다.
조선을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
1894년부터 1897년까지 3년간 4차례 한반도를 여행한 이사벨라바드는 서울로 가는 길은 소가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가늘고 미로 같았다며 식별 가능한 정도의 통로일 뿐이라고 썼다.가로 두 바퀴 이상의 차량이 없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산업 혁명에 필요한 것
산업혁명은 큰 기계를 제작하고 대량으로 상품을 제조한다.산업기계를 만들려면 나무 가공기술이나 금속 가공기술은 필수다.그리고 제품을 각 지역으로 운반하기 위한 유통이 필요하다. 원자재나 상품을 운반하는 차, 원래 길이 있어야 한다.작업원에게 작업공정을 전달하거나 제조기록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화폐경제가 없으면 제품을 만들어도 거래도 할 수 없다.당시 한반도에는 산업혁명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없었다.
아울러 읽고 싶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을 덮고, 역대 조선왕조는 속국화 - 대륙반도에서 본 일본의 위상이란.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중국 대륙이 뚜껑
건국부터 중국의 속국
이후에도 계속 중국의 침공을 받는 조선
이민족 지배를 받아온 중국과 조선
북방민족에서 역사를 보다
일본통치만을 규탄하는 한국
한반도는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중국 대륙이 완전히 뚜껑을 덮은 듯한 지형 로 되어 있어 중국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피해자 의식이나 일본에 대한 적대감은 도대체 무엇일까.한국에서 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차이는 지도상에서 보는 지정학적 이유가 크지만 그뿐만이 아니다.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이라는 구도로 생각해 보고 싶다.
전설상으로는 단군조선, 기자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으며 고고학상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후의 위씨조선부터라고 한다.
전설상 기자조선은 중국 은나라 기자가 건국했다고 하며 위씨조선도 중국 연나라 위씨가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모두 중국의 속국으로 건국되어 있는 .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가 난립하는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받는다.
고려가 통일왕조를 만들되 건국 직후 후당의 책봉하에 놓이게 된다.그리고 중국 원나라 때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속국이 된다.일본에는 원구로서 몽골, 고려 연합군이 두 차례의 일본 침공을 실시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이씨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여진인이라고도 하며 여진인이란 만주 지역에 있던 민족으로 나중에 홍타이지가 중국에서 청 왕조를 연다.
조선민족은 중국에서 볼 때 만리장성 바깥에 사는 이민족으로 인지되었고, 그 민족들은 유목민족으로 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조선민족은 반도라는 지리적 관계상 정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만주, 몽고 등 북방민족은 중국 한민족의 위협이자 조선인에게도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민족이 세운 통일왕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역사상 대부분 이민족이 중국 대륙을 지배해 왔다.
세계사를 보면서 북방민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라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굳이 그 구도로 본다면 중국대륙이나 한반도나 모두 북방민족의 침략을 받고 지배되어 온 역사라는 것이 공통점으로 보인다 .
위의 한반도를 침공한 수나라나 당나라나 원나라나 중국에서는 한민족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이민족 국가이다.한반도를 중심으로 볼 때도 이민족 국가이다.
한반도에 대해서는 이민족에 의한 소규모 직접적인 침공 이외에 중국 대륙 지배를 거쳐 한반도를 침공해 왔다는 것이 대부분의 흐름이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은 중국의 주변 민족 속으로 분류되는 .지리적으로 표현하면 북이에 대해 일본은 그런 의미에서 동이라고 불린다.중국, 한반도에 공통된 주변 민족인 셈이다.
위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병합을 볼 경우 한반도는 중국과도 공통되는 이민족 국가에 지배된 셈이다.그것은 중국의 이민족 국가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이 그동안 1000년 넘게 중국에 지배돼 온 것에는 불평하지 않고 일본의 35년만 1000년을 원망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똑같이 피지배지역의 역사였다는 복잡한 배경이 있는 것일까.
일본은 역사상 지금도 중국 한반도의 공통적인 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한국의 피해자 의식은 역사적으로 배양된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본을 더 끌어보면 중국 대륙도 침략받아 온 역사 그 자체입니다.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의연하게 일본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이 가져온 근대화
일본은 한반도에 산업기계, 자동차, 도로, 학교교육 등을 도입했다.신분제도를 철폐하고 노비를 개방하여 유동적인 노동력을 창출하였다.그로 인해 대량생산, 광역유통, 화폐와 상품을 교환하는 화폐경제가 생겨났다.이것이 일본이 한반도에 가져온 산업혁명과 근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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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일제강점기 이후 대만과 한국이 정반대인 이유 독립선서 건국 정신에 큰 차이
대만과 한국은 왜 이렇게 다른가
군사정권으로서 시작된 공통점
친일세력이 폭동을 일으킨 대만
대만, 한국은 공통점이 많지만
장제스 8.15 연설
이승만 3.1 임시정부 헌장 선서문
대만과 한국이 너무 다른 이유가 뭘까 생각하다 보면 국민성의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거기에 답이 있었다고 해도 해결책이 없으니 의미가 없다.
한반도 분할은 따지고 보면 냉전구조 속에서 태어나면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구도가 아니다.군사독재정권과 사회주의의 대립이라는 이상한 구조로 되어 있다.
대만을 둘러봤을 때 어떤가 하면 역시 중국 공산당과 대치한 국민당의 나라이고 일당독재제이며 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대만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일제 잔재라 하여 일본에 협력한 인간들을 차례로 숙청, 배제하였다.대만에서는 니니팔 사건이 일어나 친일 세력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곳은 크게 다른 점이지만 이후 국민당 정부는 재발을 우려해 본토 지식인과 공산주의자들을 차례로 숙청했다.숙청이라고 해서 같은 줄 알았는데 친일세력 숙청이라는 게 없었는지 여러 가지 조사를 해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한국과 대만은 공통점이 많다.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를 겪었고 종전 후 건국도 사회주의와 대치하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한국은 북한과 대치했고 대만은 중국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었다.그리고 두 나라 모두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그래서 분명히 다른 점으로 장제스의 8월 15일 연설이 있다.이하에 게재합니다.
장제스 8.15 연설
우리 중국(대만) 동포들은 구악을 생각하지 않고 남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우리 민족 전통의 높고 값진 덕성임을 알아야 합니다.우리는 일관되게 일본 인민을 적으로 삼지 않고 오직 일본의 횡포 무도한 무력을 가진 군벌만을 적으로 생각한다고 밝혀왔습니다.오늘 적군은 우리 동맹국들이 공동으로 타도했습니다.그들이 투항 조항을 모두 충실히 실행하도록 우리가 엄격하게 독려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단, 우리는 보복해서는 안 되며, 하물며 무고한 인민에게 오욕을 가해서는 안 됩니다.그들이 스스로의 잘못과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치 군벌에 의해 우롱당하고 끌려간 것을 우리는 자애롭게 대할 뿐입니다.만약 제멋대로의 적이 행한 폭행에 대해 폭행으로 대답하고, 지금까지의 그들의 우월감에 대해 노예적 굴욕으로 대답한다면, 복수는 원수를 부르고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의 싸움의 목적으로 하는 바가 결코 아닙니다.이는 우리 군민 동포 한 사람 한 사람이 오늘날 각별히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다음으로 이승만의 3.1 임시정부 헌장 선서문을 게재한다.
이승만 3.1 임시정부헌장 선 맹세문 존경하고 열애하는 우리 2000만 동포 국민에게 민국 원년 3월 1일 우리 대한민족이 독립을 선언할 때부터 남녀 노소, 모든 계급, 모든 종파는 물론 일치단결하여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 아래 지극히 공명하게 지극히 인욕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며 실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하였으니 지금 세계의 동정이 부연히 우리 국민에게 집중된 것이다.이때에 본 정부가 전국민의 위임을 받아 조직된 것이다.본 정부가 전 국민과 함께 전심하여 육력하고 임시헌법과 국제도리가 명하는 바를 준수하여 국토광복과 국기확국의 대사명을 다할 것을 지렛대로 선서한다. 동포 국민이여, 분발하라.우리가 흘린 피 한 방울이 자손 만대의 자유와 복영의 값이다.하나님 나라 건설의 귀중한 기초인 것이다.우리 인도가 바로 일본의 야만을 교화하는 일 것이다.우리의 정의가 바로 일본의 폭력보다 앞선다.동포여 일어나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자 .
장개석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나치를 인용하고 있지만 지향하는 길이 전혀 달랐음을 잘 알 수 있다.이것이 양국의 미래를 크게 가른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헌법 전문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으로서 임시정부 선서가 있습니다.거기에는 「우리의 정의가 바로 일본의 폭력보다 앞선다.동포여, 일어나서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라."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병합 반대파이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을 저지한 메이지 6년 정변 이토 히로부미 탄생 (1841년)
메이지 6년 정변(1873년) 이토오히로부미(32세)
정원구성원(국가의사결정기관)
정한론파 사이고오타카모리 에토오신히라이타가키테이스케 고토오쇼오지로 후지마타네오미
비정론파 산죠오미 이와쿠라구시 키도타카노스케 오오쿠보토시미치 오쿠마시게노부 오키타쿠토
당연하지만, 이토(伊藤)는 아직 젊고 정원의 멤버가 아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1870년부터 발족한 「공부성」의 설치에 진력.공부성은 1871년 철도 조선 광산 제철 전신 등대 제작 공학 권공 토목 등 10개 기숙사와 측량 1개 업체로 편성됐다.
산조 미타마사 대신이 병에 걸렸을 때 정한론에 반대했던 이토의 이와쿠라를 의장으로 하는 아이디어로 정한론은 실패로 끝나고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600명의 사쓰마 번사는 정치세계에서 물러나게 된다.
강화도 사건(1875년) 이토오히로부미(34세)
측량이나 항로 연구를 명목으로 한반도에 군함을 파견해 군사적 위압을 가하는 방안에 대해 태정대신 산조 미나미는 이를 비판했다.그러나 해군 다이스케 가와무라 준요시의 건의에 따라 『운양』, 『제2정묘』 등 2척의 군함이 조선 연안에 극비리에 파견된다.강화도 사건의 발단이 된 운양의 함장은 사쓰마 번 출신 이노우에 요시카루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강화도 사건을 지시했다는 오해가 있는 듯하지만 일련의 흐름을 봐도 어디에도 이토의 글씨가 없다.철도를 만들면서 전함을 지시하겠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토(伊藤)가 이와쿠라(岩倉)와 오쿠보(大久保)의 신용을 얻게 된 것은 메이지 6 년의 정변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독립문은 청일전쟁 후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여 서재필이 건설한 것 그것조차 모르는 한국대통령
동학당의 난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조약에서 한반도의 독립이 명기되자 이를 기뻐한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청나라 복속의 상징이었던 영은문을 부수고 터 옆에 독립문을 세웠다.이것이 한국 서울의 독립문이다.
서재필은 김옥균의 소꿉친구로 일본 게이오대학으로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김옥균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을 지향하지만 김옥균은 민비에 의해 보내진 자객에게 상하이에서 암살 당하고 모국으로 돌아와 시신을 토막토막 절단당해 각지에 버려지는 비참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한반도 내에 남은 서재필의 가족들도 민비 등에 의한 숙청 를 받아 차례차례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됐다.
시모노세키 조약의 서명인은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입니다.독립문은 김옥균의 동지 서재필이 지은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독립문이 일제 강점기로부터 독립한 기념으로 지어진 문이라고 믿는다.그 문 앞에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는 인간이 문재인이다.대통령 출마 선언도 독립문에서 이뤄졌고 광복절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뻐하듯 이 문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대통령의 역사인식이 이 정도면 한일관계가 개선될 리 없다.
한국에서는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해서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의 날로 되어 있습니다.그날 독립문에서 기념촬영이라니 놀랍네요
서울 명동은 일본인이 만든 메이지 마을입니다.메이지좌(明治座)에서는 많은 조선어 영화와 오락이 공개되었다.
명동은 한국의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관광지인데, 원래는 일제강점기에 메이지초 로 개발된 마을이다.이 일대는 일본인 거주자가 많아 한반도의 긴자로 불리며, 1930년대에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성점을 비롯해 5개의 백화점이 모이는 격전구가 되어 반도에서 '근대화의 상징'이기도 했다.경성부에는 메이지좌(明治座)가 개업하여 많은 영화와 연극이 개봉되었다.
한반도사람들은일제하에서근대화를보고문화적인생활을하게되었습니다.
1937년 4월 24일에는 성봉영화각과 신흥키네마가 합작하고 이규환(조선어판)과 스즈키 시게요시가 공동 감독한 조선어 최초의 토키 나그네(조선어판)(일본 개봉제 여로)가 동관에서 개봉되었다.
동관에서는 일본어판의 상영이었지만, 같은 날, 부내의 우미관에서는 조선어판이 공개되고 있다.조선의 영화사가 제작한 영화의 개봉관 역할도 해 1940년 8월 6일에는 고려영화협회가 제작한 영화 등록금(조선어판)(감독 최인규), 1941년 2월 19일에는 동아영화사가 제작한 영화 지원병(감독 안유영)이 이 관에서 개봉했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일제강점기에 의한 근대화는 한반도 사람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음이 분명하다.초가집에 살며 오솔길을 오가던 동네가 자국 감독이 작성한 조선어 영화를 즐기는 생활로 바뀐 것이다.한국은 일본에 수탈되어 노예화되었다고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한반도에서는 양반들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였고, 조선 후기에는 노비의 비율이 지역에 따라 절반에 달했습니다.신분제를 폐지하고 노비를 풀어준 것은 일본입니다.
러시아의 아시아 식민지 계획은 시베리아 철도를 보면 분명하다
러시아의 진출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육로로부터의 아시아 식민지 계획입니다.
1850년 시베리아 철도 계획이 시작되었다.
1884년 러-조 수호통상조약··청일전쟁 개전 다음날 러시아와 조선이 조약 체결.
1885년 러-조 밀약사건··일본, 청-영국을 견제할 목적으로 맺으려 한 밀약.첫 번째는 이홍장, 두 번째는 원세개에게 발각돼 실패.
1888년 러-북 육로통상조약...러시아인을 한반도 100리까지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도록 하였다.
1890년 시베리아 철도가 우랄 강을 넘는 다리가 완성.
1896년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만주의 북부를 횡단해, 하얼빈등을 경유하는 동청 철도의 부설권을 취득(러청 밀약).
189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의 철도, 우수리선 완성
1898년 뤼순·다롄 조차·중국 뤼순·다롄을 러시아가 조차.요동반도가 러시아로 넘어가다.
1900년 마산포 조차...경상남도 마산포(현재의 창원시)를 러시아가 조차.
1900년 만주·한반도 교환론·만주의 이권을 일본이 러시아에 인정함과 동시에 한반도에서 러시아가 손을 떼자는 협상(러시아는 묵살)
1900년 북청사변··의화단의 난을 평정할 목적으로 러시아가 만주로 진군, 평정 후에도 퇴거하지 않고 눌러앉는다.
1902년··일·영 동맹
1903년 용암포 사건...러시아군이 압록강 하구(현재 북한) 용암포에 군사거점을 건축
1903년 러청 밀약에 의한 동청 철도 완성.
1904년 발틱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출항.
1904년 바이칼 호수 개통으로 시베리아 철도 전 노선이 개통되었다.
1905년 일본해해전에서 발틱 함대가 괴멸하여 종전.포츠머스 조약 체결
1905년 일본이 한반도 외교권 박탈, 보호국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10년 한일 병합